대한문 금천교를 건너 처음 만난 곳, 함녕전 영역을 두루 살펴보고 중화문 앞에 도착했다. 금천교를 지나 넓은 직선 산책로는 궁궐의 중심 행차로였다고 한다. 행차로 도착지점이 바로 중화문이다.
궁궐의 중심 행차로
- 대한문 금천교-중화문
관람해설
정문에서 20m 직진한 곳에 있는 종합안내판 앞에서 시작
화~금요일, 10:30, 11:15, 13:00, 14:15, 15:00, 16:30
토~일요일, 11:15, 13:00, 13:30, 14:15, 14:30, 15:00, 16:30
공휴일, 10:00, 11:15, 14:15, 16:30
덕수궁은 정해진 시간에 해설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대한문 지나 산책로 왼쪽 덕수궁 전체 안내도가 있는 곳에서 기다리면 된다.
건물 구석구석에 숨겨진 풍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중화전 영역 이동경로
중화문→중화전→준명당→즉조당→석어당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 덕수궁 중화전(中和殿)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황제국의 위상에 맞게 덕수궁을 정비한 후, 정전인 중화전 기단의 답도에 용 문양을 새기고, 창호를 황금색으로 칠하여 황제국의 위용을 갖추었다고 한다.
중화문(中和門)
- 1902년에 건립된 중화전의 정문
- 1904년 덕수궁 대화재로 소실된 후 새로 만듦
중화문 좌우에 행각이 있었으나 없어지고 동측에 일부만 남아 있다.
비가 내리고 있는 시간 행각에서 잠시 쉬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중화문으로 들어가 중화전으로 이동한다.
중화문을 들어서면 넓은 뜰이 펼쳐진다.
여러 문무백관들이 품계석에 따라 질서있게 서서 중화전 중앙에서 조회를 주관하고 있는 왕의 모습을 그려본다.
중화전(中和殿)
1897년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다가 협소하여 1902년 새로운 정전으로 중화전을 지었다고 한다. 본래는 2층 건물이었는데 1904년 4월 화재로 소실된 후 현재의 단층 건물로 중건되었다.
앞뜰에 조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문무백관의 위치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좌우에 있으며, 중화전은 중화문과 더불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넓은 뜰 좌우에 설치된 품계석은 정일품부터 정구품까지 반듯하게 서 있다.
중화전 건물을 바라볼 때, 오른쪽이 문관, 왼쪽이 무관 자리라고 한다.
중화전과 그 앞마당은 국가 행사를 치르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중화전 앞에는 2단으로된 월대가 있고 마당에는 넓적한 돌을 깔았으며, 벼슬의 등급을 나타내는 품계석과 임금이 다니는 어도(御道)를 설치하는 등 전통 궁궐의 격식을 갖추었다.
중화전 내부 모습은 함녕전의 의자 모습과는 격이 달라 보인다.
의자도 위엄있지만, 천장까지 황금색으로 용이 꿈틀거리는 듯하다.
중화전 뒤로 돌아가면, 준명당과 즉조당, 석어당이 이어진다.
복도로 연결된 준명달과 즉조당은 쌍둥이 건물처럼 보인다.
다스려 밝힌다, 준명당 浚眀堂
190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같은 해에 건물을 다시 짓고, 1905년 8월 현판을 걸어 중건하였다고 한다.
목조 건물로 바로 옆 건물인 즉조당과는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준명당은 고종께서 신하나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곳으로, 함녕전이 지어지기 전까지는 고종의 침전으로 쓰였다고 한다. 높은 기단 위에 세워진 준명당은 정면 6칸, 측면 5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만들어졌다.
즉위(卽位), 즉조당 卽阼堂
준명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는 즉조당은 15대 광해군과 16대 인조가 즉위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1897년 고종의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한 직후 정전으로 이용하였다고 한다.
이때 즉조전의 이름을 태극전, 중화전으로 불리다가, 1902년 새로운 정전이 세워지자 다시 즉조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1904년 덕수궁 대화재 때에 소실되었던 즉조당은 그 해에 석어당, 준명당과 함께 건물을 다시 짓고, 1905년 9월 현판을 걸어 완전히 중건하였다.
중화전 뒷뜰은 넓은 공간이다.
산책로에서 뒷 건물을 바라보는 것도 좋지만, 중화전 뒤 기단 위로 올라서서 준명당부터 석어당까지 살펴보는 것도 괜찮아 보인다.
옛날에 임어(臨御)하였다, 석어당 昔御堂
1904년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같은 해에 건물을 다시 짓고, 1905년 9월 현판을 걸어 완전히 중건하였다.
덕수궁의 유일한 중층의 목조 건물로 선조가 임진왜란 중 의주로 피난 갔다가 환도한 후 거처하셨던 곳으로 1608년 2월 승하한 곳으로 추정된다.
광해군이 인목왕후를 유폐시켰던 곳, 인조반정이 성공한 뒤 광해군의 죄를 문책한 곳인 석어당은 단청을 하지 않은 “백골집”으로 아래층은 정면 8칸, 측면 4칸이며 위층은 정면 6칸, 측면 1칸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출처: 덕수궁 안내판)
석어당 본래 현판을 보려면,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내부 모습을 관찰하다가 고개를 들어 천정을 바라보면, 석어당 진짜 현판이 나타난다.
준명당과 즉조당 앞뜰과 석어당 뒤뜰 부분이 조금 겹쳐진다.
단청을 칠하지 않은 석어당 건물은 오래된 티가 역력하다.
중화문으로 들어서서 중화전 영역을 둘러봤다.
덕수궁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석조전으로 발걸음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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