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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호오백리길

대청호오백리길8구간 이지당 가는 길, 옥천 군북면 이백리

by 워~워~ 2022.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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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이지당 가는 길


대청호오백리길 8구간을 걷고 있다. 환평리 마을 길을 빠져나와 환산로 가에 서있는 환평리 갈림길에서 이지당 방향으로 내려섰다. 승용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의 넓은 임도이다. 큰 나무들로 우거진 그늘길을 걸을 때에는 서늘함이 느껴졌다.

 

작은 배낭을 매고 계신 할머니 두 분을 마주쳤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도토리를 줍고 계신 것 같다. 어렸을 때, 도토리를 주워다가 말린 후 맷돌에 갈아서 묵 만드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도토리묵을 만드실 모양이다. 여기가 이백리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대답하신다. 버스를 타려면, 대전과 옥천을 오가는 큰 도로까지 걸어 나가야 한다고 알려주셨다. 

 

대청호오백리길-이지당-이정표
환평리 갈림길 이정표

 

이지당-가는-임도
이지당 방향 임도

 

임도를 내려서는 길에 농막이 있다. 텃밭보다는 훨씬 큰 밭에서 재미있게 일을 하며, 보내는 것 같다. 배추, 무, 대파 등이 자라고 있다. 좀 널찍한 밭이 보인다. 이미 수확한지는 오래된듯하고, 잘 정리되어 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심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아직 올라오는 것이 없는 것을 보니, 추위를 이길 수 있는 무엇인가를 파종할 것 같다.

 

마을-밭
잘 정리되어있는 밭

 

이백리 마을 유래


이곳은 이백리에서 변두리에 위치한 곳이다. 그 중심은 군북면소재지가 있는 곳이다. 이백리 마을 유래는 다음과 같다. 이백리는 원래 옥천군 군북면 증약리에 속해 있던 마을로, 후에 증약리, 자모리, 이백리로 나누어 현재에 이른다.

 

이백리라 부르게 된 것은 자연 마을들을 합쳐 리동을 만들면서 이지당 마을의 백석(白石)의 를 잣백(栢)자로 고쳐 이백리 부르게 되었다. 이지당은 금 씨, 안 씨, 조 씨, 이 씨가 세운 각신서당이 있었던 곳이다.

 

백석은 “힌독골”의 옛 이름을 한자로 쓰면서 “흰”을 흰백, “독”을 돌석으로 써서 백석골이 되었다. 마을 앞에 흰 차돌이 많았기 때문에 “흰독골”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이백리 마을 앞쪽으로 고리산성이, 뒤쪽으로는 군서면 오동리와의 사이에 노고산성(할미산성)이 위치해 있다. 이곳은 백제군의 최전방 요새지로, 항상 싸움이 끊이지 않은 지역이었다.(출처 : 옥천문화원)

 

산소-옆-소나무
산소 옆 소나무

 

나지막한 능선을 S자형으로 내려서면 민가가 나온다. 그 날망 능선에 작은 소나무가 보인다. 산소를 호위하고 있는 듯, 강한 바람에도 굴하지 않고 곧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민가 뒤에는 대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섰다. 곧 불어 올 찬 바람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인다. 

 

대나무
민가 뒤 대나무 숲

 

민가 옆길에는 익숙한 이정표가 있다. 옥천 부소담악 자전거길 안내판이다. 현위치는 이지당교이다. 옥천읍에서 흘러오는 서화천을 건너는 다리이다. 환평 약초체험마을을 지나 이곳에 도착했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 왼쪽 방향으로 옥천 이지당이라고 적혀있는 안내판을 따라 걷는다.

 

 

자전거길-안내판
옥천 부소담악 자전거길 안내판

 

이지당교-다리
이지당교

 

서화천
서화천

 

옥천-이지당-안내판
옥천 이지당 안내판

 

 

 

옥천 이지당


건물 왼쪽 측면방향으로 들어간다. 천변에 암벽이 있지만, 데크길로 안전하게 걸을 수 있다. 정면과 오른쪽 방향에서도 모양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마루가 있는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바로 앞에는 서화천 물이 대청호로 유유히 흐른다.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주소 : 충청북도 옥천군 군북면 이백6길 126
- 지정번호 : 보물 제2107호
- 수량 : 1동
- 지정일 : 2020. 12. 28.

 

이지당-측면-모습
이지당 왼쪽 모습

 

이지당-정면-모습
정면 모습

 

옥천 이지당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이자 의병장조헌(1544-1592)이 뛰어난 경치를 벗 삼아 풍류를 즐기며, 제자를 가르치던 곳에, 김만균조헌의 업적을 기리고자 세운 건물이다.

 

조헌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청주를 되찾고, 금산전투에 참여하였다가 목숨을 잃었다. 의병장이면서도 뛰어난 학자로서 이이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다.

 

이지당-오른쪽-측면-모습
오른 쪽 모습

 

이지당-전체-모습
서화천 건너 방향에서 본 모습

 

이지당은 조헌의 사후 80여년 뒤인 1674년 무렵 건립하였으며, 송시열시전에 나오는 “고산앙지 경행행지”라는 문구를 빌려 이지당이라 하였다. 그 후 광무 5년(1901)에 옥천의 금 씨, 이 씨, 조 씨, 안씨네 문중에서 보수하여 현재에 이른다. ‘이지당’이라는 현판은 송시열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고앙지 경행행지, 高山仰止 景行行止 : 산이 높으면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고, 밝은 행실은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조헌을 비롯하여 조선 후기 문인들의 시판이 남아있다. 이지당은 조헌 사후에 정사로 활용되어 기호학파의 학맥을 이으며 유지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정사 : 학문의 연구나 정신 수양을 위하여 세운 집)

 

이지당-현판
이지당 현판

 

이지당-서판
내부 시판 모습

 

건물의 규모는 정면 6칸, 측면 1칸이다. 몸체 좌측에 3칸, 우측에 2칸의 익랑을 연결한 ‘ㄷ’ 모양 기와집으로 구성하여 조선 후기의 소박하고 단아한 건축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특히 양 익랑을 중층의 누를 덧붙여 지은 경우는 매우 드문 형태여서 가치가 높다.(익랑 : 문의 좌우에 잇대서 지은 행랑)

 

이지당은 금강 상류의 한 지류인 서화천을 굽어보는 산비탈에 터를 잡아 앞으로는 유유하게 흐르는 강이 펼쳐지고, 뒤로는 기암에 기대고 있어 사계절 수려한 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각신서당-현판
각신서당 현판

 

대전으로 다시 돌아가는 버스를 타야 한다. 동네 할머니가 말씀해주신 대로 서화천 옆 도로를 따라 걸었다. 옥천 하수처리장 앞을 지난다. 서화천 물 위에 있는 오리를 구경하려 하니, 겁이 난 것인지 멀리 날아가 버린다. 냇가에 자리 잡은 갈대들 바람에 흔들린다.

 

경부고속도로, 경부선 철도 다리 밑을 지나 서정리(당골 마을)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대전 비래동이 종점인 607번 버스를 탑승했다. 대청호오백리길8구간 마을, 이백리에 위치하고 있는 이지당까지 걸었다.

 

서화천-옆-도로
서화천 옆 도로

 

옥천-하수처리장
옥천 하수처리장 정문

 

서화천-갈대
서화천 갈대

 

당골마을-버스정류장
당골마을 버스정류장

 

[대청호오백리길] - 대청호오백리길8구간 마을 길, 옥천 군북면 환평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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